단순 건망증일까, 인지기능 저하일까? 작업치료사가 바라본 ‘깜빡함’의 이유
“내 안경이 어디 갔지?”
“분명 여기다 뒀는데…”
“휴대폰을 찾으려고 휴대폰으로 전화했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일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거나, 방금 하려던 일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걱정이 됩니다.
“혹시 치매 초기증상 아닐까?”
하지만 물건을 한두 번 잊어버렸다고 해서 바로 치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억력’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집중, 작업기억, 실행기능, 정보처리 속도가 함께 관여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물건을 자꾸 잃어버리는 걸까요?

① 사실 ‘기억력’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주의집중입니다
예를 들어 안경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해볼게요.
그런데 그 순간 전화가 옵니다.
전화를 받으면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다시 다른 일을 합니다.
나중에 안경을 찾으려고 하면
“내가 안경을 어디에 뒀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정말 ‘기억력이 나빠서’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안경을 식탁 위에 놓았다는 정보가 충분히 주의집중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동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주의집중 → 정보 입력 → 기억 형성
이라는 과정에서 첫 단계부터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특히 여러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거나 주의를 빠르게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려움이 나타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② “어디에 뒀지?”에는 작업기억도 필요합니다
작업기억(Working Memory)은 쉽게 말하면
‘지금 필요한 정보를 잠시 머릿속에 붙잡아 두고 사용하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을 거실에 두고 주방으로 갔다가 다시 가져와야지.”
라고 생각했다고 해볼게요.
그런데 주방에 도착하니 갑자기 다른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하게 됩니다.
이때는 단순히 장기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하려던 행동의 목표를 머릿속에 유지하는 작업기억과 주의조절이 함께 필요합니다.
작업기억은 단순히 정보를 잠깐 저장하는 것뿐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과도 관련됩니다. 이러한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일부 과제에서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③ 물건을 찾는 데는 ‘실행기능’도 필요합니다
여기서 작업치료 관점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무작정 찾는 것 같지만 사실 머릿속에서는 꽤 복잡한 과정이 진행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봤지?”
→ “아까 거실에 있었나?”
→ “거실에서 주방으로 갔었지.”
→ “그러면 식탁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다.”
→ “없네. 그럼 내가 이동하면서 다른 곳에 뒀나?”
이 과정에는 계획하기, 정보를 정리하기, 기억을 활용하기, 순서를 바꾸어 생각하기, 문제를 해결하기 등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입니다.
실행기능은 계획, 조직화, 문제해결, 인지적 유연성, 행동 조절 등 우리가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작업치료에서는 인지기능을 단순히 ‘문제 풀기’로만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상생활을 얼마나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단순 건망증과 인지기능 저하는 어떻게 다를까요?
여기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거나, 어떤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노화 과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IA)도 가끔 물건을 잘못 두거나 기억이 늦게 떠오르는 것을 정상적인 연령 관련 건망증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화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얼마나 자주 잊느냐’만이 아닙니다.
단순한 건망증에서는
- 물건을 가끔 다른 곳에 둔다.
- 생각이 잘 안 나다가 나중에 기억난다.
- 힌트를 주면 기억이 난다.
-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가끔 잊지만 다시 확인하면 수행할 수 있다.
조금 더 주의해서 살펴볼 변화는
- 같은 질문이나 이야기를 반복하는 일이 많아진다.
- 익숙한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 돈 관리나 약 복용 등 이전에 하던 일을 자주 놓친다.
-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아지고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전혀 단서가 떠오르지 않는다.
- 날짜나 장소를 혼동하는 일이 반복된다.
- 대화나 언어 사용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다.
특히 기억력 저하가 실제 일상생활의 독립성을 떨어뜨리는지는 중요한 관찰 포인트입니다. NIA(미국 국립노화연구소) 역시 치매에서 단순한 건망증을 넘어 일상적인 활동 수행에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작업치료에서는 ‘기억력’만 보지 않습니다
작업치료에서 중요한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기억력이 몇 점인가?”
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실제 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이 생겼는가?”
를 함께 봅니다.
예를 들어
✔ 약을 제때 먹을 수 있는지
✔ 옷을 스스로 챙겨 입을 수 있는지
✔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지
✔ 외출 준비를 순서대로 할 수 있는지
✔ 물건을 사용한 뒤 제자리에 둘 수 있는지
✔ 길을 잃지 않고 익숙한 장소를 이동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모두 인지기능과 연결됩니다.
인지기능은 책상 앞에서 문제를 푸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행동 하나하나 속에 인지기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 물건을 안 잃어버리게 하려면?”
무조건 기억력 훈련만 하는 것보다 환경과 행동을 함께 바꾸는 방법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① 물건마다 정해진 자리를 만들기
안경은 항상 침대 옆
휴대폰은 항상 충전기 옆
열쇠는 현관 수납함
처럼 위치를 일정하게 만들어 줍니다.
② 행동할 때 말로 확인하기
“지금 안경을 식탁 위에 놓는다.”
처럼 자신의 행동을 말로 확인하면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③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기
TV를 보면서 물건을 정리하고, 전화를 받으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한 가지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④ 메모와 알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메모, 달력, 알람, 체크리스트는 기억력이 부족해서 사용하는 ‘보조물’이 아니라 인지 부담을 줄여주는 환경적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깜빡함’은 기억력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 하나만 보더라도
주의집중 → 정보 입력 → 작업기억 → 실행기능 → 기억 회상 → 실제 행동
이라는 여러 과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요즘 자꾸 깜빡해.”
라고 말한다면 단순히
“나이 들면 다 그래.”
라고 넘길 것도,
“치매 아니야?”
라고 바로 걱정할 것도 아닙니다.
언제부터, 얼마나 자주,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 어떤 변화가 함께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기억이나 인지 변화가 점점 심해지거나 일상생활 수행에 영향을 준다면 의료진의 평가를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억력 저하는 정상적인 노화 외에도 다양한 원인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자쌤의 한마디!!
우리는 흔히
“기억력이 나빠졌나 봐.”
라고 말하지만,
그 행동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억력만의 문제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이니까요.
그래서 재활에서 인지기능을 볼 때는
머릿속의 기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봅니다.
오늘도 우리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놀자쌤의 “왜 그럴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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